日月五岳圖 硏究

 

서울대학교  교수 안천

皇室學論叢

第5號

융희 95년(2001년) 12월 31일

韓國皇室學會

   I. 들어가는 글   [ 바로가기 ]

   II. 우리민족의 정치상징  [ 바로가기 ]

   III. 일월오악도의 정치상징적 의미분석  [ 바로가기 ]

   IV. 일월오악도의 정치인류학적 추적  [ 바로가기 ]

   V. 맺는 글  [ 바로가기 ]

 

I. 들어가는 글

 인간의 삶은 상징(symbol)이다. 인간의 역사는 상징체계의 흐름이다. 특히 전통 사회 인류의 삶은 모든 것이 상징으로 엮어진다. 그리하여 정치 인류학은 수많은 상징체계의 의미를 체계화하며, 전통사회 인류의 삶을 재구성하여 나가는 것을 중요한 연구 목적으로 한다.

 우리 민족의 옛 삶을 분석해 보아도 수많은 상징으로 엮어져있음은, 지구촌의 다른 민족과 똑같다. 우리민족의 옛 정치사회를 세밀하게 분석해 들어가면 수많은 상징체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이 엮어지는 고도화된 정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먼 옛날의 고조선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질적 차이는 많이 생겼어도 언제나 변함이 없어서, 상징세계의 흐름을 다양하게 표출하는 것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정치생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왜 인간의 정치생활은 정치적 상징과 그토록 직결되는 것인가?.

 

 첫째로 정치 상징은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어준다. 수많은 사람들을 뭉쳐서 융합시키며 한 마음 한 뜻이 되게 만들어준다. 지구상에 태어나는 인간들은 누구나 하나의 개체로서 각자 따로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면서 결코 외따로 떨어질 수가 없고, 특정 사회에 합해져 정치적 삶을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정치 생활을 결정적으로 촉진시키며 뭉쳐주는 힘을 정치상징은 극대화시켜 준다. 예컨대 국기는 단순히 헝겊에 상징화된 문양(紋樣)이 있을 뿐이지만 그 나라의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결정적 정치 상징이다.

 

 둘째로 정치 상징은 정치적 호소력을 가진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확고한 의미를 전달하며 정치사회가 뜻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간다. 각자의 사람들은 그냥 놓아두면 모두가 제멋대로 자기의 길을 각자 간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래알 같이 나뉘어서 흩어져 버리면 그 사회는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정치력이란 흩어지고 분열된 사람들을 특정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것을 뜻할 수도 있는데, 정치 상징은 그것을 확실하게 돕는다.

 

 셋째로 정치상징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서 정치 지도자에게 관심을 갖도록 해준다. 정치체는 그 정치 사회에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하면 정치체가 뜻하는 의지를 관철시킬 수가 없다. 정치상징은 색깔이 첨가된 표어나 문양 등으로 의미를 표출시켜서 사람들이 저절로 깨닫게 하거나, 인식시키고, 호의적인 따뜻한 반응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넷째로 정치 상징은 정치체의 존속과 유지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어떠한 정치체나 생명력을 갖고 삶을 지속시키려 한다. 권력이나 권력자나 권력의 속성은 그것을 계속하여 연장시키려한다. 정치 상징은 권력의 삶을 연장시켜 줌에 중요한 일을 하며, 권력자의 힘을 계속 이어 나가게 만들어 준다.

 

 다섯째로 정치 상징은 권력을 강화시켜 준다. 먼 옛날의 정치지도자는 도끼를 들고서 싸우기도 하고 씨족의 숭배물에 빌거나 주술사가 되기도 하면서 본인의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정치가 발달하면서 정치지도자는 정치적 경쟁 사회에 알맞은 가치를 상징화함에 의해서 권력을 강화시켜 나간다. 정치지도자는 따라서 수많은 정치적 상징을 통해서 본인의 권력을 끊임없이 재창출시키고 강화시켜 나간다고 생각된다.

 

 

II. 우리민족의 정치상징

1. 고대시대의 정치상징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수많은 고대시대 유물들은 크고 작은 정치 상징물들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고대 시대의 유물들을 보면 그 시대에도 정치 사회를 이끌기 위한 정치 상징물이 다양하게 만들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상징물은 일반적으로 정치지도자의 것이 많지만 다양한 수준의 권력자가 가졌던 정치 상징물들도 발견된다.

 

 고대시대 우리민족의 정치 상징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이라고 하겠다. 우리나라는 고인돌 왕국이라고 말할 정도로 세계 고인돌의 절대다수를 보유하고 있다. 고인돌은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정치상징물로는 절대적 위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은 남만주의 요동반도에서 많이 발견되나 우리 민족의 삶이 영위되었던 넓은 지역에서 폭넓게 발견되어 고조선의 강역을 연구함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칼의 몸체가 비파라는 악기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붙여진 비파형 동검은 일반적으로 당시의 지도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청동 칼이었다고 해석된다. 실제적 칼로서의 실용성보다는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물로서의 기능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청동기시대 정치 상징물에는 비파형동검 만큼 중요한 것으로서 청동거울과 창동방울이 존재하고 있다. 아마도 이 세 가지가 고대 권력자의 권력을 상징하는 가장 결정적인 존재였다고 생각된다. 일본 천황가의 3대 보물은 청동거울과 비파형 동검에다가 곡옥(曲玉) 목걸이인데 그것들을 비밀리에 숨겨두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생각건대 청동기 정치 상징물은 만주 땅에서부터 멀리는 일본에 까지 공통으로 발견되는 존재로서 당시의 정치권을 형성시켜주는 핵심 상징물이었다고 생각된다.

 

 고대시대의 정치는 매우 많은 상징물로 만들어져 있었으며 종교와도 직결되어 있었다. 당시의 지도자는 정치 지도자와 제사장을 겸하고 있으면서, 정치적 위상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기능도 뚜렷했었다고 생각된다. 고대 시대의 지도자였던 사람은 비파형동검, 청동거울을 비롯한 다양한 상징물을 갖고 있어서, 그가 입고 있는 옷 전체와 삶 전체는 총체적인 상징 구조물이었다고 해석된다. 고대시대의 흐름을 잇는 청동기와 비슷한 것들이 현재에도 우리나라의 토속신앙인 무속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우리 민족과 비슷한 문화권을 갖고 있는 시베리아 지방의 토착종교에 있어서도 상징물이나 상징체계가 매우 비슷한 것이 최근까지도 계속하여 사용되고 있다. 또한 몽골 땅에는 오늘날에도 옛부터의 상징물을 그대로 갖고 있는 샤먼(shaman)이 그대로 있고, 그것이 살아있는 종교의 모습으로 존재하고도 있다.

 

2. 삼국시대의 정치 상징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삼국시대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삼국시대에는 보다 발전된 모습의 정치상징을 보게 된다. 청동기시대의 유물에서 보다 한층 세련되고 문화적인 우수성이 돋보이는 정치상징물이 다양하게 만들어져서 정치 발전에 큰 기여를 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는 나름대로 막강한 국력을 갖고서 긴 세월을 정치체로 존재했었다. 그러므로 매우 발전된 정치 상징물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주 땅에 있는 부여시대 유물에는 청동개구리가 있다. 아주미적 감각이 있는 세련된 개구리인데, 그것은 부여의 금와왕(金蛙王)을 보아도 개구리가 얼마나 신성시되고 정치상징으로 높게 받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견제하였으며, 해부루(解夫?)의 아들로서 부여의 왕이 된 그를 상징하는 청동개구리는 정치 상징물로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정치 상징물에서는 단연 삼족오(三足烏)가 돋보인다. 만주 땅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고분에는 태양신과 달신의 신비한 상징그림이 나온다. 거기서 남성인 태양신은 세 발 까마귀가 그려진 태양을 들고 있고, 여성인 달신은 개구리 혹은 두꺼비가 그려진 달을 들고 있다. 그것은 고구려인들에게 있어서 개구리와 까마귀가 매우 존귀한 존재로 받아 들여 졌음을 뜻한다. 고구려의 삼족오는 전통적인 상징도 안에 있어서는 가장 뛰어난 예술품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멋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서양인들이 독수리나 매를 존중하는 원색적인 공격성 상징을 가졌음에 비해서, 상당히 수준 높은 철학을 배경으로 한 상징물을 가졌었다고 생각된다. 세 발을 가지고 신비한 마력을 지닌, 민족 철학적 토대위에서의 독특한 정치 상징은 고대시대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드문 탁월한 정치 상징물임이 분명하다.

 

 백제의 정치 상징물은 6세기 작품으로서 부여에서 발견된 국보 287호(국립부여박물관 소장)인 세기의 명작 금동대향로를 들 수 있겠다. 백제 유물이 그리 많이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발견된 향로는 다양한 모습의 상징물을 집합시킨 뛰어난 예술품임이 분명하다. 그 향로는 우리의 민족정신이 환상적으로 조형화 되면서 예술품으로 승화되어 백제인의 삶을 그대로 상징화시켜 보여준다. 그리고 백제의 대표적 정치 상징물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다양한 유물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무덤을 지키는 돌짐승이 매우 멋진 정치상징물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신라에는 매우 다양한 정치 상징물이 존재한다. 천마총이나 다른 임금님 무덤에서 깨끗한 옛 모습 그대로 발굴된 유물을 보면, 신라의 정치 지도자는 온 몸이 정치 상징물로 덮여져 있었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모습의 상징물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가운데에서도 신라의 대표적인 정치 상징물은 현란한 모습의 금관이 아닐까 한다. 금관은 모든 조형 자체가 수준 높은 상징세계를 말해주고 있고, 우리 민족의 대표적 상징물의 하나라고 할 곡옥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그 상징성을 보다 드높게 만들어주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상징 조각물을 매단 허리띠도 매고 있어서 전체적인 상징성을 확장시켜 주고 있다.

 

 3. 고려시대의 정치 상징

 

 고려시대에는 나름대로 현대적인 정치 상징물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남아있는 바가 별로 흔하지 않다. 개성에는 어느 정도의 건조물이 남아 있어서 축조물로서의 정치 상징물이 되기도 하겠지만,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전성시대로서 불교 자체가 바로 정치적 권위를 뒷받침해주는 상징세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수많은 석탑과 부도, 사찰과 함께 불상이나 불화와 같은 많은 불교 예술품이 만들어져서, 흡사 서양의 정치 세계가 기독교에 뒷받침되어서 존재했던 것과 같은 흐름을 만들었었다고 하겠다.

 

III. 일월오악도의 정치 상징적 의미 분석

1. 조선 시대의 정치상징물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정치 상징물이 현대시대에 가까워지는 만큼 매우 수준 높게 발달된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의 정치 상징적 건조물은 궁궐과 성, 관아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학(儒學)관계 건물인 성균관, 향교, 서원, 서당 들이 정치적 권위를 말해주는 상징체계로서 존재한다.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사찰 대신에 유학관계 건조물이 권력의 상징을 대신하면서 다양하게 발달되었다. 일제침략에 의해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대다수가 훼손되고 멸실 되었지만 오늘날에도 당당한 권위를 말해주는 모습을 뚜렷하게 남기고 있다.

 

 조선시대 정치적 상징물의 최고 수준은 무엇보다도 원구단 및 종묘와 사직이 최우선시 되겠다. 원구단 및 종묘와 사직단은 조선 정치체를 뒷받침하는 최고의 정치 상징물이므로 침략 일본이 훼손할 첫 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일제 강점 상태에서 흡사 쓰레기 방치물 같이 대우를 했었는데, 최근에는 종묘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록이 되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침략일본 시대의 방치 상태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지금은 그 앞이 흡사 난잡한 오락장같이 창피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조선시대 정치 상징물로 최고 수준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하늘의 뜻에 따라 임금님이 되었음을 성언한 상징물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그러나 최근까지도 창경궁 돌담 옆에 방치되어 있다가 불과몇 년 전에야 그 가치가 인정되어 국보로 지정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의 황제가 하늘의 뜻을 받아 등극했음을 뜻하는 제천단으로서의 원구단은 일제가 조선호텔을 만들어 훼손했는데, 원구단은 지금도 상처입은 유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다음으로 중요한 정치 상징물은 전주시에 있는 경기전(京畿田)이 되겠는데 그것은 조선 황실의 발상지로서 조선시대의 국기, 애국가와 같이 생각될 만큼 종요한 정치 상징이었다. 그토록 중요한 존재였기에 침략 일본은 그 곳을 초등학교로 만들어 훼손시켰었는데, 3년 전에야 초등학교를 이전하고 경기전을 원래의 상태로 만들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임금님을 보위하고 정치적 권위를 확립하기 위한 정치상징은 다양하게 존재했었다. 봉황, 용과 같은 전통적인 동양 정치상징물은 물론이고 십이지신상에 해당하는 온갖 상징물까지도 널리 쓰여졌다. 그런데 이상의 많은 정치 상징물은 나름대로 그간 연구가 되어지며 오늘에 이르렀으나, 유독 임금님의 용상 뒤편을 장신하는 일월오악도는 사실상 전혀 연구가 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2. 일월오악도의 정치사적 위상

 

 현대적 모습을 띤 우리민족의 정치 상징은 조선말기 이후에 등장한다. 태극기가 조선말기에 만들어졌다고 하고, 무궁화를 국화로 지정했으며, 애국가가 항일독립전쟁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한황실의 오얏꽃 문양상징도 등장했다. 그런데 여시서 우리가 유의할 사항은 우리의 국기, 국화는 사실상 머나먼 옛날부터 우리민족의 정치 철학을 형성하고, 정치 생활에 폭넓게 나타났던 것으로서의 전통적인 정치상징물과 같은 것이었음이다. 애국가는 항일전쟁 때에 독립항쟁의 흐름 속에 새로 만들었지만, 무궁화는 머나먼 예부터 우리의 삶에 깊게 뿌리내린 것이었고, 태극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우리의 정치 철학을 지배해온 뿌리 깊은 정치 상징물인 것이다.

 

 그런데 예전의 대표적 정치 상징물의 하나였던 일월오악도만은 그간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일월오악도는 임금님의 생존시나 사후에 구별이 없이, 어디에나 임금님의 존재가 있는 곳에는 임금님을 상징하고 임금님을 보호하는 구실을 했었다. 살아계신 임금님의 용상 뒤에는 물론이고, 돌아가신 임금님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에 까지도 분명하게 그 뒤에는 일월오악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생각하면 아직 국기, 극가, 극화와 같은 현대적 국가상징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있어서,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임금님의 용상(龍狀) 뒤를 장식했던 가장 최고의 정치상징물이었던 일월오악도가 그간 사실상 잊혀져 왔던 까닭은 무엇일 것인가?

 

 첫째로 일월오악도는 임금님을 상징하는 대표적 존재였기에 감히 어떤 생각을 갖는 것도 송구스러워서 연구를 시행하지 못하고 세월이 흘렀다고 행각된다. 옛 궁궐에 가보면 꼭 만나는 그림이건만, 일제 강정 당시만 해도 우리민족의 대다수는 임금님을 극진히 모시는 존황정신이 확실했었기에 임금님을 상징하는 그림은 무조건 존숭하고 아끼는 절대적이 존재였지, 그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불손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음이 분명이다. 현재에는 그 의미 전승이 사실상 끊겼으나 당시에는 일월오악도의 유래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둘째로 일월오악도를 침략 일본의 서슬 푸른 강점상태에서는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웠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 문화의 많은 부문이 일제 침략으로 단절 상태가 되고 전통이 끊긴 비참한 모습이 되었는데, 일월오악도는 임금님을 상징하는 그림이었기에 당연히 그렇게 되었을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비극의 그 상시에 침략일본이 끊고 훼손시킬 제일순위의 존재는 황실이 분명하고, 황실문화에 있어서도 가장 핵심적인 위상을 갖는 일월오악도는 분명히 단절될 수밖에 없는 그림이 분명한 것이었다.

 

 셋째로 일월오악도는 자유당 정군 시대의 황실 탄압 분위기에 의해서 망실되는 흐름도 강화되었음이 사실이다. 이승만의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여 야당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하지도 않았고 일당 독재에 가까운 정치를 했던 시대에 있어서, 이승만의 정적에 대당할 황실을 견제하고 탄압하던 분위기는 침략일본의 시대보다 오히려 더 강화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조선황실의 유물이나 문화재는 헐값에 팔려 나가면서, 자유당정권에 잘 보이면 사실상 그냥 나눠주는 듯한 부패상을 노정시켰던 때였으니 일월오악도에 대한 생각이 전승될 까닭이 없었다. 그 당시에 황실 재산은 황실배출의 상징이었던 운현궁부터 시작하여 핵심 궁궐이나 궁중 유물, 궁중재산들이 불하라는 미명 하에 낱낱이 팔려 나갔다. 아니 그저 분양해 주듯이 나눠주었고 파산한 가정의 재산분배 하듯이 흩어져 나갔다.

 

 넷째로 일월오악도는 현대 시대에 들어서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역사와 단절되는 비운의 길을 갔다고 생각된다. 현대시대에 들어서 이북은 사회주의 체제로, 이남은 미국식 대통령제로 바뀌어졌다. 두 체제가 똑같이 임금님을 부정하는 체제이다. 두체체가 똑같이 전통과 역사를 부정하는 체체인 것이다. 소련(러시아)은 혁명에 의해 역사를 근본부터 바꿨고, 미국은 유럽에서 몰려 온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신대륙이란 미명하에 인디안의 땅을 약탈해서 세운 나라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모국인 유럽의 다수국가들이 임금님이 계신 나라인데, 우리는 거꾸로 전통단절의 미국과 소련만을 따랐다. 오늘날에도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벨기에, 룩셈부르그, 태국 등에서는 감히 황실문화를 훼손할 수는 없는 일이나, 우리 사회는 법도를 잃은 무엄한 흐름이 강하게 흘렀던 것도 사실이다.

 

 다섯째로 일월오악도는 조국을 침략일본에서 다시 찾은 이후의 정권 주도층에 의해서도 멀어졌다고 생각된다. 우리 민족은 항일 독립전쟁 기간에 핵심 정예가 옥쇄 당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민족 가운데 진짜 훌륭한 인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침략일본에 고개 숙이면서 숨죽이고 지낸 부끄러운 사람들과 친일파가 주로 남았다. 자유당 이후의 이 나라를 부끄럽거나 치욕적인 인물들이 정권을 쥐며 주도적으로 이끌었기에 사실상 내면적 심서는 침략 일본의 침략적 흐름이 강하게 흘렀었다. 그렇기에 우리 황실 문화가 살아남을 여지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고, 일월오악도도 잊혀짐을 강요당하며 오늘에 이른 것이다.

 

3. 일월오악도의 현존 상황

 

 일월오악도는 현재 21점이 남아있다. 그 가운데 13점은 병풍으로서 주로 4폭 내지 6폭짜리이다. 나머지는 액자가 4점, 별장 문짝이 4점 전한다. 임금님의 용상 뒤를 장신ㄱ하는 일월오악도는 임금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만큼 궁중 회화를 관장하는 관청인 도화서 화원에 의해서 국가적으로 그려졌다고 생각된다. 화원의 신분은 중인이며 시헌에 의해서 엄격하게 선발되었는데, 특히 임금님의 상징인 일월오악도는 최고 수준의 실력을 가진 화원에 의해서 그려진 것이라고 짐작된다.

 

 현재 전해재는 궁중회화는 대부분이 조선중기(17세기) 이후에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 전해지는 궁중회화는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장생도, 사군자화, 초상화, 도석 인물화, 무예도, 궁궐도, 능행도, 군영도, 의궤도, 문자도 등 20종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작품의 크기와 표구 유형은 병풍, 족자, 가리개, 문짝, 벽화, 화첩, 편액 등이며, 이 가운데 병풍과 가리개가 약 66%를 차지하고 있음은 조선시대 궁중 미술의 성향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조선시대 궁중화를 그린 물감 재료들은 석채, 유채, 수채, 수묵, 칠, 나전, 자수 등 다채로우며, 병풍 형식은 4,6,8,10,12,곡(曲)등으로 다양하고 높이는 150cm내지 330cm이며 폭은 40cm내지 125cm로 다양하다. 현존하는 병풍은 약 200여점으로서 그 가운데 화조도가 26점, 모란도가 20점, 자수가 17점, 십장생도가 2점인데 일월오악도는 13점이 남았으므로 일월오악도는 그리 흔한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일월오악도는 임금님의 용상 뒤를 비롯하여, 임금님이 계신 곳은 어느 곳이나 그 병풍을 세워 놓아서 장식을 한 특수한 그림인 만큼 일월오악도가 21점이 남은 것은 그대로 많은 숫자가 남았다고 생각된다. 침략일본은 갔는데도 불구하고, 일월악도는 그 작품적 위상으로 인해서 감히 약탈을 하기도 어려웠고 약탈하여 이용할 방안도 없었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4. 일월오악도의 정치 상징적 의미

 

 앞에서도 살폈듯이, 현재로서 일월오악도가 무엇을 뜻하는가는 의미상 단절상태의 성향이 높다. 그러나 일월오악도에 대해서 현재로서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바는 첫째로 오로지 임금님만이 쓸 수 있는 그림이었고 둘째로는 우리민족의 독특한 정치상징으로서 외국에서는 거의 찾을 수가 없는 독보적인 그림이란점이다.

 

 그 외에는 뚜렷하게 우리가 일월오악도의 의를 말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따라서 일월오악도는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그 의미가 단절되고,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 의미가 재해석되고 재정리되는 성격이 짙다.

 

 현존하는 일월오악도는 그 구성인자가 비슷하여 해, 달, 산, 솔, 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은 임금님이 다스리는 나라의 땅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들로 이해된다. 이 그림은 여러 신(神)의 보살핌 속에 나라와 나랏님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그림이다. 황실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이 그림에서는 임금님과 황후마마가전 국토를 잘 다스리고 항상 영화를 누기리글 기원하는 홍, 청, 백, 녹, 회색의 다섯 색상을 배합한 민족 전통의 무늬로 되어 있다.

 

1) 일월(日月)의 의미

 

일월오악도를 구성하는 핵심은 바로 해와 달일 거서이다. 여기서 해는 임금님을 뜻하고 달은 황후마마를 뜻한다고 보여 진다. 그런데 해와 달에 영혼이 있다고 믿어서, 홍수나 가뭄의 피해가 없이 일년 농사의 풍작을 비는 예부터의 신앙은 일월신(日月神)으로 해와 달을 모시는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해마다 문열림(文熱林)에서 제사를 지냈고 경주지방에서는 설날에 달과 해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월신앙의 뿌리는 멀리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뚜렷하게 살아 있어서 우리민족의 예부터의 전통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벽화에는 남성신이 해를 들고 있고, 여성신이 달을 들고 있다.

 

 고구려의 남성신은 고등신(高登神) 혹은 해모수(解慕漱)이다. 고등신은 하백녀 유화와 해모수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그 아버지인 해모수의 해(解)는 태양(日)과 통하는 개념으로서 태양숭배 종족의 철학을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고대시대 우리민족의 역사에 나오는 지명, 인명 등은 음차(音借) 이두 글의 성향이 높은데 해모수는 ‘태양을 모셔 받든다’는 의미로서 천제(天帝)의 아들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선사시대 고고학 유물들은 해뜨는 아침을 높게 받들며 태양을 숭배하는 성향이 높아서, 선사시대 석관묘는 정확하게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다. 일월오악도는 태양은 민족정신사적으로 매우 그 뿌리가 깊은 것으로서 그것은 이미 선사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의 태양 숭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겠다. 특히 최근까지도 농촌에서는 정초에 부적을 만들어 붙이면서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태양신 속의 세발 까마귀(삼족오:三足烏)가 삼재팔난(三災八難)을 물리쳐주는 신령스러운 새로 여겨졌으며, 세발 까마귀가 삼재 귀신을 잡아먹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전통 사상을 많이 갖고 있었던 항일 애국자들이 만주 땅에서 세운 학교라든지 건물에 동명(東明)이 많이 남은 것도 주목되어야 하겠다.

 

 생각건대 조선시대에는 먼 옛날 고대시대부터의 태양숭배 사상이 임금님을 모시는 전통 철학으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권근 대감이 주도하여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가 고구려 때의 별자리 그림 탁본을 비장하고 있던 농부가 내놓은 그림을 바탕으로 그렸다는 얘기를 생각해 볼 때에도, 조선시대의 태양숭배 사상은 우리민족의 기나긴 전통이 남은 것이 분명하다.

 

 다음으로 달(月)은 고구려 벽화에서부터 유래되어 나오는 여성신의 표출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고주몽 동명성왕을 낳은 유화부인은 바로 고구려의 여성신으로서 지모신(地母神)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 이러한 사상은 우리민족의 정치 철학을 뚜렷하게 대변한다고 생각된다. 고등신의 고등(高登)은 중국어 음차글로서 가웃땅이 되겠는데, 이것은 고려(高麗)의  음차글인 ‘까우리’와 같은 것으로서 가운데 땅의 최고신을 뜻한다고 이해 될 수 있다. 따라서 ①처제사상, ②해모수, ③부여신이라고도 부른 유화, ④고등신의 네 가지를 합한 종합적 체계는, ⑤하늘과 ⑥태양, 그리고 ⑦벌판의 이두로 보는 부여(夫餘)사상과 함께 그 중심 가웃땅에 고주몽이 나라를 세웠음을 뜻한다.

 

 특히 달신을 뜻하는 부여신 유화는 달 속에 개구리 혹은 두꺼비를 안고 있는데, 그것은 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서 비롯된 개구리나 두꺼비 숭배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농촌에서는 사람들이 두꺼비를 매우 영험스런 동물로 생각하는 흐름이 강했음을 알고 있는데, 그 뿌리는 매우 깊은 것이며 일월오악도의 달(월)님은 옛날부터의 우리민족이 가진 고유한 철학이라고 해석된다.

 

2) 오악(五岳)의 의미

 

 오악의 뜻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자료는 현재로서 쉽게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뜻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일월오악도의 그림이 민화의 성격을 띠기도 하면서, 예부터의 전통사상을 상징화시켜서 임금님의 용상 뒷 그림으로 쓴 뒤에, 그 유래를 뚜렷하게 밝히는 글을 남겨 놓지 않은 때문이라고 하겠다. 오악의 뜻을 설명하는 것을 현재의 주어진 상태로서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겠다.

 

(1) 전통사상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유명한 산으로 다섯 개의 산을 들었는바, 중앙의 삼각산을 필도로 하여 동서남북의 4방에 각각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을 합해서 오악이라고 불렀다. 나라의 산 가운데 중요한 다섯 개의 산을 정하여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민족 전래의 오래 된 기본신앙이었으며, 기나긴 전통사상으로 정착해 내려왔다. 삼국시대 이래로 조선시대까지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기우제, 구태민안을 비는 일은 계속 되어 왔으며, 오악숭배 신앙은 국가의 안녕을 비는 거국적 민족 신앙으로 뿌리내려 왔다고 하겠다. 또한 오악숭배는 고대시대의 미족사상에서도 뿌리가 내려진 깊은 역사를 가진 것으로서 우리 민족이  천손족(天孫族)이었음과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예부터 지도자를 천제(天帝)혹은 천제자(天帝子)로 보았으며, 민족 시조인 단군(壇君)도 몽골말 텐그리(tengri)에서 온 것으로서 하늘이란 뜻을 갖고 있으니 바로 단군은 하느님이란 뜻과도 같다.

 

 우리의 단군역사를 보면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 천황은 태백산에 강림한 산신님이었고 그 아들 단군 천황도 아사달의 산신으로서, 천신사상(天神思想)의 깊은 뿌리를 발견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명산 꼭대기는 많은 곳에 천황봉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천신사상과 오악숭배 사상의 잔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현재로서는 잊었고, 잃었으나, 먼 옛날에 우리에게서 수입해간 일본에서는 천황(天皇)이 현재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도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2) 도교사상설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도교에서는 태산을 동악, 형산을 남악, 숭산을 중악, 화산을 서악, 항산을 북악으로 설정하여 신격을 부여하고서, 이 오악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각각의 산을 복자(福字), 상자(祥字), 길자(吉字), 희자(喜字) 모양을 한 부적에 대입시켜서 인간의 길흉화복의 주재자로 간주하였다. 그리하여 도교에서는 오악이 인간의 생사를 관장한다고 보아서, 동악의 부적을 가지면 장수를 누리고, 남악의 부적을 가지면 수해나 상해를 막을 수 있고, 중악의 부적을 가지면 재산을 늘릴 수 있고, 서악의부적을 가지면 전쟁으로부터의 참화를 면하게 해주며, 북악의 부적을 가지면 물로 부터의 수난을 면하게 해주는 것으로 보고 있다.

 

 어떻든 도교에서는 오악신앙은 오악이 인간의 삶을 관장하면서, 복된 삶을 지켜주는 신령스런 존재로 받아 들였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사상이 일월오악도에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3)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오행설은 멀리 중국의 전국시대 음양사상가 추연()에 의해서 체계화된 이론으로 본다. 오행설은 꾸준히 발달되면서 예부터의 우주론인 음양론이 가미되며 매우 정교한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음양오행설은 우주의 구조와 운행원리를 설명하는 근본 틀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은 형실 사회만이 아니라 내세의 삶까지도 관장하는 질서운영의 근본 원리로 수용되어지게 되었다. 음양오행설은 그 후 발전되어 오행상승설(五行相勝說)로 발전되고, 다시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오행설은 유교적 정치 이념은 물론이고 도교 계열의 민간 신앙에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쳐 나갔다.

 

 그리하여 오행설은 점차 사회 여러 분야의 도구와 틀로 쓰여 지고,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크고 작은 제반 구성단위를 모두 오행설로 해석하는 흐름으로까지 발전해 나간다. 그리하여 개인의 삶과 국가 정책에 이르는 모든 활동이 음양오행설에 맞는지 여부를 헤아려 보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꾸준히 발전했고, 그것은 그 후 죽은 사람의 묘지를 보는 것으로까지 발전해 나간다.

 

 고구려시대의 우리민족은 이미 건국 초부터 오행설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었고, 이를 정치에 활용하였다. 외교정책, 국정운영이념, 정치구도 설정, 지배이념의 강화와 같은 데에 폭넓게 오행설이 활용되었고, 그것은 고구려인의 삶을 깊이 있게 이끌었다.

 

(4) 동양미술설(東洋美術說)

오악을 동양의 고전인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천보(天保)시에 언급된 천보구여(天保九如)의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것은 예로부터 동양미술은 매우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다양한 기법을 사영하였음에 착안한 해석이다. 따라서 동양화를 보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읽고 이해하는 그림이라는 입장에서의 해석인 것이다. 물고기 아홉 마리를 그리며, 그것은 구어(九魚)와 구여(九如)의 발음이 비슷하여, 천보의 시에서 유래한 축송(祝頌)의 뜻이 되는 것이다.

 천보의 시는 신하가 임금님에게 보답하는 뜻의 노래로서 예부터 구여도는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와 같은 의미로서, 그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일월오악도라고 보는 것이다.

 

3) 나머지 구성물의 뜻

 

 일월오악도의 산 모양은 힘찬 굽이를 이룬 바위돌이 첩첩이 쌓여서 다섯 봉우리를 이루는 형태로 되어 있다. 다섯 봉우리는 가운데에 중심된 가장 큰 산이 힘차게 솟아 있고 좌우로 대칭상태에서 두 개씩의 산이 놓여져 다섯 개를 형성한다. 매우 상징성이 높게 조형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의미하는 바가 강하게 느껴진다.

 

 또한 해와 달을 좌우로 대칭시켜서 양쪽의 두 봉우리의 사이에 놓아두는 바도 거의 정형화되어 있어서 오악에 떠있는 해와 달의 위상을 의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해는 빨간색, 달은 흰색으로 정형화되어 있음이다. 조선시대의 임금님은 태양으로서 붉은 색으로 상징화되고 황후마마는 달님으로서 흰색으로 상징화되어 정착된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이 있으니 양쪽으로 대칭시켜서 힘차게 쏟아지는 두 줄기 폭포수의 존재이다. 폭포수는 미적 의미를 갖고 그려 넣은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 풍부한 물의 존재가 나라를 다스리는 그 어떤 힘을 상징하는 것인가? 두 물줄기는 더구나 힘찬 흐름과 함께 신비스러움까지 낳는 모습을 연상시켜 준다.

 

 그리고 앞쪽으로는 다섯 봉우리 앞으로 작은 봉우리가 파도와 같이 연이어 지고, 그 사리올 힘찬 물보라를 일으키며 물방울이 힘있게 튀어 솟는 가운데 물이 넘쳐 흘러가는 모습이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나라 전체가 임금님과 황후마마의 넒은 은덕에 의해 우순풍조하고 복된 혜택을 두루두루 입는 듯한 벅찬 감동이 그림 전체에서 저절로 솟아오른다.

 

 그리고는 양옆으로 우란하게 솟아 오른 소나무가 그림의 끝부분을 장식해 준다. 소나무는 예로부터 장수를 뜻하고 군자들이 애호하는 핵심적 존재로서 선비의 고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빌고 드높은 품격을 갖도록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월오악도는 이런 그림 속에 동물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전반적으로 치밀하고 장엄하게 그려진 극채색의 그림으로서 독특한 환상 세계를 상징적으로 표출시키고 있다.

 

 

IV. 일월오악도의 정치 인류학적 추적

 생각 밖으로, 현대시대인 오늘날에 일월오악도를 사실상 살아있는 그림으로 모시는 마을이 있다. 그곳은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마을로서, 마이산에서는 마이산을 마로 일월오악도의 오악을 구성하는 성스러운 산으로 모시고 있다.

 

 마이산은 봉우리 두 개가 높이 솟아 있기 때문에 통상 용출봉(湧出峰)이라고 하며, 예부터 동쪽은 아버지, 서쪽은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현재도 속칭으로 동쪽을 수마이산(673m), 서쪽을 암마이산(667m)이라고 부른다. 마이산은 사시사철 부르는 별명도 달라서 봄에는 돛대를 닮았다고 돛대봉, 여름에는 용의 뿔을 닮았다고 용각봉(龍角峰), 가을에는 마이산이고, 겨울에는 붓끝을 닮았다고 문필봉(文筆峰)이라고 부른다.

 

 마이산은 매우 기묘하게 생겨서 말 귀 같기도 하고, 멀리 높은 곳에서 보면 여인의 풍성한 젖가슴 같이 보이기도 하고, 밑에서 보면 깎아지른 쌍둥이 돌탑 같기도 하여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 신비로운 산이다.

 

 산은 모두가 바위덩어리인데, 우리가 흔하게 보는 바위덩이가 아닌 역암()으로서 자갈돌을 시멘트 콘크리트로 섞어서 차곡차곡 쌓은 듯이 보이니 흡사 사람이 인공으로 쌓은 것같이 보이는 산이다. 바위 속에는 물고기 화석이나 조개껍데기도 섞여 나오고 있는데, 이것은 이 지역 일대가 먼 옛날에 바다였다가 솟아올라서 산이 된 때문이다.

 

1. 성스러운 머리산

 

 마이산은 예전에 신라때에는 서다산(西多山)이라는 원래의 이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꼭 신라때가 아닌 먼 옛날부터 그렇게 불린 것일 것이다. 이것은 우리민족의 예부터의 지명이 음차 이두글임을 생각할 때에 소도산(蘇塗山)의 소리가 바뀌어져서 불리운 것이라 생각된다. 이속은 예전의 삼국시대 때의 기록에 이미 성스러운 땅으로서 제천(祭天)행사를 했던 곳으로 되어 있는 만큼, 먼 옛날부터의 소도문화가 이어지던 민족 성지라고 하겠다.

 

 이 산의 이름은 그 후 고려 때에는 용출산 이었다가 조선 태조때에 속금산(束金山)이 되었는데, 마이산은 조선 3대 태종임금님이 조선 황실 발상신화가 깃든 이 속에 들렀을 때에 진안읍의 성묘산에서 산신께 제사를 올리고는 마이산을 보며 마치 말귀같이 생겼다면서 웃었다는 데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중에 지어낸 꾸며진 속설로서의 우스갯 얘기일 것이고 강화도 마니산이 고려시대에 마리(머리)산이었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마니산으로 변한 것처럼 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진안의 마이산도 원래는 마리(머리)산이었다가 바뀐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백두산이 머리산 이듯이, 우두머리가 되는 신성한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마이산을 가려면 427m의 곰티 혹은 곰치고개(熊峙)를 넘어야 하는데, 이것은 신(神)고개의 우리말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원래 한자말 신(神)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마라로 신은 감(가미, 곰, 구마)이었는데 현재는 이것이 일본말과 같이 멀리 떨어진 오지 지역에나 땅이름 등에 남아있다. 일본은 예전에는 미개한 오지 혹은 벽지였고 그것이 현재도 일본말 가미(神)로 남아 있는데, 곰치고개로서의 신(神)고개가 성스러운 머리산 입구에 있다는 것은 전혀 잘못될 것이 없다. 마이산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금당사(金塘寺)와 고금당(古金塘)이 있는데, 이도 바로 감(金)님을 모시는 삶이 불교와 결합하여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마이산은 태조 이성계 장군에 의해서 속금산(束金山)이라고 불려 지게 되었다는데 이것은 태조 이성계 장군에 의했다기 보다는 예부터의 토착명칭의 하나가 태조임금님 때의 기록에 남은 것이라고 생각되니 ‘깊은 산 속에 있는 감(神)님이 계신 산’이란 뜻을 줄여서, 속에 있는 감(金)산이라는 뜻의 이두글자가 남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니 속금산은 깊고 깊은 산 속에 숨겨진 신비의 성스러운 산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마이산은 첫째로 성스러운 소도산, 둘째로 가장 으뜸가는 머리산, 셋째로 깊은 산 속 깨끗한 감(金)님의 산이라는 뜻의 세 가지가 복합된 드높은 민족 성지였음을 뜻한다. 요즘에는 그 원래의 뜻이 말 귀로 낮추어서 아무렇게나 우스개소리같이 해석하고, 훗날의 꾸며진 얘기같이 전승되면서 변질된 이름을 갖고 있는데 원래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2. 조선 황실의 발상신화

 조선 황실의 발상지를 뜻하는 경기전(京畿田)은 전북 전주시에 있다. 전주시에는 따라서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등의 황실 발상 유적이 존재하고, 가까운 대둔산에도 이성계 장군의 전선이 남아있다. 그런데 경기전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는 성스러운 머리산에 이성계 장군의 신비로운 얘기가 없다면 오리혀 이상한 일이 아닐까? 마이산 입구에는 장군이 임실의 성수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내려와서 마이산에 닿으며 말을 매어 놓았던 자리라고 한다.

 

 이산묘는 예전 조선시대부터 태조 고황제의 사당으로 존재하고 있던 것을 3.1만세 항쟁 후에 초라한 모습의 건물을 헐어 내고 재건하려 하자 이리제가 탄압하여 여의치 못했고, 단기 4279년(1946년)에야 일제가 물러나고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만든 것이다. 이산묘는 첫째로 단군성조와 태조 고황제, 세종, 임금님, 광무황제의 위패를 모신 회덕전(?德殿), 둘째로 조선시대의 유명한 재상과 유학자를 모신 영모사(永慕祠), 셋째로 조선말기 시대의 애국지사와 의병장 33위를 모신 영광사(永光祠)로 이루어져 있다.

 

 전라북도에는 경기전이 있는 만큼 조선황실의 발상전설이 적지 않이 깃들어 있는데, 특히 마이산은 이성계 장군의 임금님 등극을 예언하는 정치 신화의 성지로서도 유명하다. 이성계장군은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전라도 운봉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는 길에 마이산에 들러 산신께 기도를 올렸으며, 마이산에서 잠을 잘 때에 꿈속에서 신령님(神人)이 나타나 황금으로 만든 자(尺)를 주었다는 몽금척(夢金尺) 신화에 의해서 임금님이 될 사람임을 이미 예정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마이산 바로 밑에는 은수사(銀水寺)라는 절이 있는데, 이곳에는 이성계 장군이 몽금척 꿈을 꾼 그림과 함께 모조금척이 모셔져 있다. 태조 고황제 등극의 정당성을 말하는 정치 신화의 대표적 존재가 바로 마이산 몽금척 신화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 전설에 의하면 산신령님께서 이성계 장군에게 황금자를 주면서 ‘네가 잴 수 있을 만큼 재어 네 땅으로 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 장군이 잰 크기만큼이 조선시대의 국경이 되었다는 것이며, 오동반도의 드넓은 민족발상지 옛 땅을 뛰어 넘어 광활한 중원땅을 자로 재기 못한 것이 아쉽다는 전설적 얘기인 것이다.

 

 현재 진안군에서는 매년 10월 11일에 마이산제를 제산천의() 의식에 따라 매년 거행하고 있으며, 12일에는 마이제 본제 행사로 다양한 행사를 펴는데 몽금척무(夢金尺舞)행사가 화려하게 펼쳐진다. 몽금척무는 이곳에서만 유일하게 공연되는 것으로서 이성계 장군의 몽금척 꿈을 기려서 정도전이 태조 2년(1393년) 7월에 관습도감(慣習都監)으로서 직접 만든 궁중무용이고 그 음악은 몽금척요(夢金尺謠)라고 부른다. 진안군에서는 단기4218년(1985년) 몽금척무를 마이제 행사의 꽃으로 재현시켜, 민족문화 발전의 견인차가 되게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일로써 몽금척무를 지은 정도전은 그의 꿈과 경륜을 말하면서 ‘삭풍이 휘나리는 벌판을 말을 타고 끝없이 달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정도전은 조건을 건국한 설계자로서, 그가 몽금척 꿈을 유념하면서 삭풍이 휘날리는 벌판을 말을 타고 끝없이 달려가려는 풍운의 사나이였다면 몽금척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 것인가? 정도전은 최소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려는 큰 꿈을 갖고 나라를 세웠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을 다시금 건설하려는 웅략을 품었던 것이 분명한 것이다. 진안군에서 매년 펼치는 몽금척무 행사는 정도전의 꿈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뜻하는 살아있는 역사가 분명할 것이다.

 

3. 이갑룡 항일 독립운동

 조선황실 발상성지에 해당하는 마이산은 조선말기의국나기에 다시금 항일 전설의 성지로 재탄생된다. 이산묘의 영광사 사당에 33위의 애국지사와 의병장이 모셔져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이 된다.

 

 마이산은 신비롭게 생긴 성스러운 산으로서도 유명하지만, 근래에는 답사가 있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탑사는 크고 작은 80여 개의 돌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탑사의 탑은 인공적인 돌로 만든 탑이 아니라 자연석을 막돌허튼식이란 독특한 방법을 써서 정성껏 교묘하게 쌓아 올려서 커다란 첨탑을 만든 신비한 모습의 탑이다. 천지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八陳圖法)에 따라 축조하여, 아무리 비바람이 쳐도 무너지지 않고 우뚝선 놀라운 탑이다.

 

 이 탑을 쌓은 사람은 단기 4193(서기1860년) 3월 25일에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이갑룡 의사다. 이갑룡은 9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25세부터 73년 동안을 오로지 이 탑사를 완성함에 생애를 바쳤다. 수없이 많은 돌을 혼자서 날라다가 정성껏 석탑을 쌓아 올린 경이로운 위업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1) 이갑룡 항일운동의 내용

 

(1) 민족전통문화 계승보존

 

 첫째로 이갑룡은 민족 최고의 조상인 단군의 뜻을 받드는 일을 했다고 생각된다. 마이산은 단군성조의 드높은 얼을 받드는 머리산으로서 고대시대 부터의 민족 성지이다. 바로 이곳에 탑사를 건립하면서 모든 정성을 쏟은 것은 단군 성조의 높으신 은덕에 의해서 일제 침략의 국난을 막아달라는 간절한 소망의 뜻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탑사의 탑은 본시 불교의 탑이 아니라 먼 옛날에 우리 민족이 소도를 만들 때에 쌓았던 탑의 원형이 남은 것이라고 보겠는데, 이는 바로 단군성조 이래의 소도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는 성지임을 재확인해 주는 사업이었다고도 생각된다.

 

 이갑룡이 마이산에 정착할 때에 산신령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지는 얘기도 뚜렷한 단군 소도문화의 유풍이다. 물론 탑사는 세월이 지나면서 불교와도 연결시킨 성향을 짙게 갖고 있는데, 원래 우리의 전통적 삶은 긴 세월에 걸쳐서 불교와 연결됨 토착화되어 왔기에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런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논할 것이 있는데 탑사를 탑사(塔舍)로 볼 것인가 탑사(塔寺)로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 까닭은 어떤 자료에는 탑사(塔舍)로 되어 있고, 또 다른 자료에는 탑사(塔寺)로 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답은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을 내리기 보다는 차라리 두 가지가 다 맞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갑룡이 단순한 스님이 아니었음을 그의 삶에서 분명히 알 수 있고, 탑사의 옛 건물도 전혀 고유한 불교사찰 그대로가 아니다. 이갑룡이 만든 탑은 단군 이래의 민족 고유의 탑을 그대로 이었고, 그것이 훗날 불교와 연결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탑사는 단군시대의 모습이 원형대로 남은 최고의 성지임을 유념한 해석이 되어야 옳다. 그리고 그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불교와 접목이 된 것이다.

 

 탑사 아래에는 오래된 절인 금당사(金塘寺)가 있다. 여기서 금당(金塘)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것은 생각 건데 먼 옛날의 감터가 변해서 된 이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금당은 감터, 감따, 감땅의 이두 글이 분명한 것이다. 감터는 고조선 시대에는 검독(檢瀆)으로 부른 이두 글로써 감님이 계시는 터로서의 성지를 뜻한다. 마이산 지역은예부터의 소도가 있던 감터로서 감땅, 감따 혹은 감터하고 부르던 것이 변해서 비슷한 이두글인 금당이 되었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이산 지역은 먼 옛날에 민족의 원형적 종교에 해당하는 흐름을 갖고 있다가 점차 불교가 들어와서 융합이 되는데 그 이름도 옛날의 흔적이 그대로 비슷하게 남았다고 해석이 되며, 탑사의 모습도 먼 옛날 고대시대 부터의 흐름이 확실하게 오늘에도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탑사는 고대시대의 감터가 원형 그대로 남은 민족최고의 성지가 확실하다. 이갑룡은 민족전통문화를 지킨 측면으로 볼 때에도 엄청난 위업을 이룬 인물이 틀림없다.

 

(2) 전통적 항일운동의 실천

 

 둘째로 이갑룡은 항일전쟁의 의사(義士)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대구시 팔공산에 있는 이제묘(二帝廟) 유적과도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이제묘는 최상실 의사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전통적인 모습의 항일의거로서 유교식 제사를 모시는 의식에 의해서 일제 참략을 물리치려는 것이엇다.

 

 그런데 이갑룡의 탑사는 최상길이 철저히 유교식을 따랐음에 반하여, 고유의 민족 단군성조 방식과 불교식이 어우러진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정신적 혹은 종교적 항일의거였다고 하겠다. 탑의 배치는 제갈공명의 팔진도법(八陣圖法)에 따랐으며, 천지탑, 일광탑, 오방탑, 중앙탑(흔들탑), 월광탑, 신장탑 등을 음양의 이치에 따라 형태를 만들고 그 높이는 오행(五行)의 원리에 따라 결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중앙에 중군을 두고 전후좌우에 여덟 개의 진을 배치한 모습으로서 사실상 외적을 물리치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이갑룡은 모든 우리 민족을 단군 정신과 불심(佛心)에 의한 항일애국자로 만들려는 깊은 뜻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있어서, 민족전체의 마음을 어떻게 깨우칠 것인가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였었고,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모든 정성을 들여 돌 하나하나에 기도를 한 후 탑을 쌓아나간 그의 행위는 중요한 항일 의거였음이 분명하다.

 

(3) 단호한 민족주의 활동

 

 셋째로 이갑룡은 민족정신을 깨우치려는 선각자였다고도 해석된다. 탑사 가까이에 있는 이산묘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곳에는 태조 고황제와 세종 임금님은 물론이고 특히 광무황제와 조선말기 의병장의 위패가 모셔져 있음이 유의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이산묘를 세운 시기가 바로 국난기인 일제강점 시기로서, 한 밤중에 침략일본인들이 모르는 때에 공사를 했고 일본인들이 오면 돌을 던져서 물리쳤다고 하는 곳이다.

 

 그리하여 침략일본이 물러간 뒤에 의병창의지 였던 이곳을 기념하기 위해 자유당 때의 대통령인 이승만의 글로써 광복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질 만큼 의미가 큰 곳이다. 또한 김구선생의 친필각자가 새겨진 병풍암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까 민족 전체의 마음을 각성시키려는 뚜렷한 의지가 없으면 탑사나 이산묘가 존재하기가 어려웠음을 말하는 것이다.

 

(4) 존황정신의 선구자

 

 넷째로 이갑룡은 존황정신의 높은 뜻을 가진 충신이었다. 이갑룡이 태어나 살았던 때는 임금님이 계시던 시기였다. 일제 강점기의 비극적 시대도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인질 임금님으로서의 황태자 영왕이 분명히 계시던 때였다. 이갑룡은 나라가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나랏님이 무너지는 것에도 통탄을 했을 것이다. 그는 젋은 나이에 전국의 유명한 산을 찾아다니다가 감정이 끓어오르면 산제(山祭)를 올렸다고 하며, 조선말기의국난시대에 군대에 들어가 포장(捕將)을 하다가 임오군사의거를 거치며 군대를 나와 다시 방랑 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25세 때에 산신의 계시를 받아 마이산에 입산하여 고행과 기도를 하면서, 생식으로 이으며 평생에 걸쳐 탑사를 쌓았다고 한다.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자연석 돌탑의 신비로운 120여기는 입산수도의 흐름 속에 탄생하는 것이다. 그의 젊은 시절의 방랑과 군대 생활은 바로 국난기의 청년이 몸부림치면서 앓은 애국적 분노와 울분의 홍역이었고, 그것을 거쳐서는 나라와나랏님을 위한 온갖 정성을 모아 탑사를 건설한 것이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전주 이씨로서 나름대로 황실 가문의 사면감도 있었을 것이며, 구민된 도리로써 나라가 무너지는 뼈아픈 고통 속에 각성을 하고서 탑사를 쌓았다는 해석도 된다.

 

 이갑룡의 손자 이왕선은 어렸을 때에 수없이 이갑룡의 분노하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갑룡은 사람들을 만나면 왜놈들이 무엇이라고 이 나라를 다스리느냐고 울분을 토하면서 우리 임금님이 계셔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고는 했다고 한다. 이갑룡은 말하길,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섬길 분은 임금님인데 임금님을 배제하고 무슨 정치를 하느냐고 열변을 이으면서 왜놈들의 잘못을 말했다고 한다.

 이갑룡은 특히 자유당 시대에도 분노하는 세월을 보내다가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갑룡은 항상 말하길 이승만이 도대체 어찌 임금노릇을 하려고 하느냐면서 분개하고, 외국에서 떠돌아다니던 자가 지금 와서 임금노릇을 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하고는 했다는 것이다.

 

 이갑룡은 말하길, 이승만이 아무리 독립운동을 했다고는 해도 임금을 몰아내고 나라의 뿌리를 무시한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자주 비난을 했다는 것이다. 이갑룡에게 있어서 이승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자가 분명했던 것이다.

 

(5) 항일 비밀기지 건설

 

 그런데 그가 확실한 애국지사였음을 증언하는 얘기가 최근에 들어서 수집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황실의 마지막 숨겨진 황손 이초남의 증언으로서 아주 의미 있는 얘기가 있다. 그의 어머니 유정순은 항일운동을 위해 숨어서 다닐 때에, 이갑룡을 여러 번 와서 만났고 위태로운 상황이 되면 숨어 지낸 때도 있었다고 한다.

 

 효령대군 16대손 이갑룡은 탑사를 쌓는 정신적 항일전쟁 애국자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항일의거의 인물이었고 실제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였다는 이다. 따라서 탑사는 숨겨진 황후 유정순을 도운 존황항일의 성지이면서, 동시에 독립군의 비밀기지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초남의 증언을 보완해주는 얘기로서, 이갑룡의 손자 이왕선이 그의 조부가 독립운동을 많이 도왔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점도 지적되어야 하겠다. 일본경찰이 오면 애국자를 이불속에 숨겨서 보호해준 일이나, 일본경찰을 눈을 부릅뜨고 쫓아낸 일, 그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많이 제공한 얘기를 수없이 보고 들었다는 것이다.

 

 이갑룡은 그리하여 일본경찰의 추적도 여러 번 받았는데, 그는 일본경찰이 잡으러 오면 쏜살같이 수마이산에 올라가 숨어 버려서 일본경찰이 손을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이갑룡은 차력을 하여 힘도 세었고 축지법을 쓴다고 할 정도로 발걸음이 빠르고 산을 잘 탔다고 한다.

 

 이갑룡의 항일활동에 대한 결정적 증언을 그의 손자 이왕선의 얘기를 통해서 들어볼 수 있다. 이왕선이 어렸을 때에 이갑룡은 탑사를 운영하면서 당시에도 탑사에는 돈이 계속 들어 왔는데, 돈이 생기면 마을주민들에게 송아지를 사 주어 기르게 한 뒤에 어미소가 되어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는 주민을 조고 어미소를 데려오는 방식으로 돈을 늘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이런 방식이 흔했는데 농민들 송아지를 데려다 기르려고 앞을 다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왕선이 어려서 직접 본 것으로서만 최소한 10여마리 이상의 큰 소가 생기면 조용히 없어지곤 했다는 것이다.

 

 어렵게 길러낸 어미소가 금새 없어지곤 해서 할아버지께 직접 물어보면 단순히 탑사 제사돈으로 썼다는 답변뿐이었는데, 당시 제사돈이 소를 팔정도로 엄청난 금액은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로서 소를 판돈은 거금이었다는 것이다.

 

 이갑룡은 그렇게 벌어들인 엄청난 돈을 계속 가족도 모르게 없애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런 큰돈이 계속 사라지니까 가족들도 궁금해 하면서 물었고 어린 손자인 이왕선도 물어 보았을 정도의 분위기였는데, 이갑룡은 간단히 답변하고는 입을 다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과거에 연구한 광무황제의 숨겨진 며느리 유정순이 소를 끌고 만주 독립군에게 계속 갔다는 얘기와 너무나 일치한다. 특히 유정순이 그의 아들 이초남에게 이갑룡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번 피력했다는 얘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시기도 왜적강점 말기로써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 이왕선은 초등학교 2, 3학년 정도로서 왜적 강점시대의 말기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생각건대 이갑룡은 매우 많은 돈을 독립군에게 계속 제공했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이갑룡의 소는 계속 만주로 갔음이 분명하고, 유정순은 이런 흐름 속에서 소장사로 변장하고 계속 만주를 향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이왕선이 직접 눈으로 본 것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계속 다녀갔었다고 한다. 봇짐장사, 옷장사도 있었고 중절모를 쓴 신사도 있었으며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계석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아마 유정순도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왔다 가고는 했을 것이다. 이왕선은 이런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할아버지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당시 왜경들이 자주 찾아 왔었다고 한다. 특히 조선인 헌병보조원이 수시로 다녀가고는 했었는데, 와서는 집요하게 누가 다녀갔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며 그것을 이왕선이 여러번 목격했다고 한다. 와서 한 질문은 예컨대, 독립운동가 아무개가 다녀갔느냐? 돈은 주었다는데 얼마를 주었느냐? 등을 질문하면 이갑룡은 매번 호통을 치면서 그런 사람은 본 적도 없다고 말하며 왜경을 꾸짖고는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자 나중에는 아무개가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거꾸로 말하면서 살살 꼬여서 유도신문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갑룡은 매번 나는 수도하는 사람일 뿐이라고 답변하고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어떻든 탑사에는 유명한 항일애국자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탑사는 항일전쟁 비밀기지였음이 분명한 것이다.

(2) 이갑룡의 항일 운동의 의미

 

 지금까지 나온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이갑룡을 단지 신비한 탑을 쌓고 산속에 묻혀서 도를 닦은 일물로만 단순하게 정리하고 있다. 그리하여 곳곳에서 도사(道士) 혹은 산중처사(山中處士)정도로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수없이 많은 항일전쟁 애국자들이 잊혀지고 심지어는 매도를 당하거나 폄하되며 오늘에 이르렀듯이, 이갑룡도 철저히 평가절하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온 여러 자료들은 근본적으로는 틀린 자료들이고, 이갑룡을 제대로 평가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다. 우리가 그간 생각해 왔듯이 이갑룡은 결코 산속에 묻혀서 산 도사나 평범한 처사가 아니다.

 

 그는 단군 이래의 민족전통 문화를 지킨 문화 사랑의 위업을 이룬 인물 이었으며, 고유의 전통적 방식을 따른 항일전쟁 애국자였다. 그리고 철저하게 민족혼을 확립하여 국난을 극복하려는 민족주의자였다. 특히 그는 나라와 나랏님을 지키려는 존황정신의 화신으로서, 모든 정성을 다해 임금님과 나라를 다시 찾으려는 삶을 산 존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항일전쟁 독립군 비밀기지를 운영하면서 군자금을 대고 독립운동가를 숨겨 주는 등의 뜻 깊은 일을 많이 한 인물이었다.

 

 그간 이갑룡을 수동적 염세주의자, 전근대적인 삶을 산 도사, 시대에 뒤진 미신 숭배자, 산 속에 파묻힌 산중처사로 몰아간 흐름은 철저히 고쳐져야 한다. 우리는 언뜻 생각하길 독립운동이란 총을 들고 독립군이 되거나, 항일전쟁의 망명 지도자가 된 것만을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다양한 형태가 있는 것이다. 나라를 찾겠다는 높은 뜻이 표출되는 것은, 현대의 우리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을 뛰어 넘는 상상 밖의 사례가 매우 많다. 이갑룡의 애국은 그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초유의 사례이다. 그는 앞으로 탑사건설을 중심으로 독특한 애국을 한 항일전쟁 독립운동가로 재평가되어야 옳다.

 

4. 살아있는 일월오악도

 

 성스러운 소도산이며, 으뜸가는 머리산으로서, 깊은 산 속의 감(金)산인 마이산은, 대한 황실 발상신화를 가진 산이며 항일애국의 높은 뜻이 깃든 산이라고 지금까지 정리해 왔다. 그런데 마이산은 그 곳의 주민들이 대한 황실의 상징인 일월오악도의 원형(原型)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우리는 일월오악도가 상상의 정치상징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국내의 유명한 오악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런데 마이산 사람들은 일월오악도의 핵심이 바로 마이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분명한 확신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이산은 조선황실의 발상신화를 낳은 몽금척 전설의 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들이 가진 확신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1) 포괄적 견해

 첫째로 마이산을 오악의 하나라고 보는 생각이 있다. 이 경우에도 하나는 국내의 오악 가운데 하나로 보는 개념이 있고, 또 다르게는 멀리 중국인들이 와서는 중국의 사나들과 연결하여서 이것이 동아시아 오악의 하나라고 말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하나의 해석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마이산 마을의 주민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산 주민들은 다음 두 번째의 견해를 확신하고 있기에 몽금척무 행사를 오늘날에도 재현하고 문화행사를 갖는 것일 것이다.

 

2) 마이산을 주체로 본 견해

 그러면 두 번째로서 마이산 자체가 바로 몽금척 정치신화를 잉태한 터전으로서의 일월오악도라고 보는 견해는 매우 정치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마이산을 몽금척 정치신화의 성지로서 형상화시킨 그림이 바로 일월오악도라고 보는 견해인 것이다.

 

 마이산은 바로 앞에서 보면 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다. 그렇지만 보다 멀리 떨어져 적절한 위치에서 보면 일월오악의 형상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서쪽의 화전 쪽에서 보면 마이산을 중심으로 봉우리가 연이어 진 것이 흡사 일월오악도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적인 모습에 덧붙여서 마이산이 마로 섬진강과 금강의 발원지라는 점을 볼 때에, 두 물줄기가 힘차게 내려오고 그 물이 흘러 넓은 들판을 적시는 것을 그대로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드니 일월오악도는 이 모습을 도형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짙게든다.

 

 당시의 정치의식으로 볼 때에 몽금척 성지로서의 마이산이 형상화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하겠으니, 대한제국 시대 최고훈장이 금척대훈장이라고 정해지는 의식상황이라면 일월오악도로의 형상화도 결코 우연은 아니라고 하겠다. 마이산은 조선시대 성지 가운데에서도 으뜸 되는 위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이산 앞은 삼국시대의 호칭으로는 월랑(月浪 혹은 越浪)으로서 물결치듯 산이 펼쳐진 모습으로 일월오악도의 밑부분과 꼭 같다. 이렇게 신비로운 경치를 일컬어 예부터 월랑팔경(月浪八景)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①마이귀운(馬耳歸雲)-마이산에 구름이 드리운 풍경 ②강령목적(羌嶺牧笛)-진안읍 강령 산골길의 목동이 부는 피리소리 ③부귀낙조(富貴落照)-진안읍 부귀산의 낙조 ④고림모종(古林慕鐘)-부귀산 저녁 무렵 고림사의 은은한 종소리 ⑤우정제월(羽亭霽月)-진안읍 우화산 우화정의 비갠 뒤 달경치 ⑥학천어정(鶴川漁艇)-진안읍 학천에 고깃배 뜬 모습 ⑦우주세우(牛走細雨)-진안읍 학천 들판을 달리는 소에 흩날리는 가랑비 ⑧남루효각(南樓嚆角)-진안읍 남룰의 시각을 알리는 뿔고동 소리의 여덟가지를 말하는 바, 월랑의 모슴이 눈에 보이듯 제대로 이해가 돌 것이다.

 

 마이산 지역은 원래 광대한 진안고원(鎭安高原)의 한 부분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무주군, 자아수군에 걸쳐서 대덕산, 덕유산, 백우산 등의 높은 봉우리로 연결된 소백산맥과, 운장산, 만덕산의 노령산맥을 포괄하는 매우 넓은 산악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원은 호남지방의 지붕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곳으로 금강, 섬진강, 만경강의 상류를 형성하며, 금강상류는 무주구천동의 수려한 경치를 만들고 다시 마이산은 금강과 섬진강의 발원지로서 빼어난 풍광과 함께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자연의 풍광 속에 해와 달을 대입시키고 십장생의 의미를 가미하여 일월 오악도가 만들어졌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요컨대 마이산은 몽금척 정치신화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실제의 일월오악도로서 대한황실의 발상을 뜻하는 전설적이고 실질적인 성지라는 뜻이다.

 

3) 이갑룡과 마이산

 이갑룡은마이산과 연결시킬 때에 어떤 해석이 가능한 인물인가? 이갑룡은 왜 마이산에서 일생을 바쳐 탑사를 건설했을까?

 

 그것은 이갑룡이 무엇보다도 마이산이 가진 존황사상의 성지라는 위상을 분명하게 유념한 때문일 것이다. 단구 이래의 유구한 민족정신을 잇는 터이면서 조선황실의 발상신화가 깃든 곳이라는 점을 철저히 유의한 가운데, 마이산을 진짜로 살아있는 일월오악도가 되게 하려고 모든 정성을 쏟았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이갑룡의 정신은 마이산과 연결시켜 다음과 같이 생각해야 옳다.

 

 첫째로 온 민족이 하나로 뭉쳐서 항일성전에 나설 것을 염원하며 탑사를 건설했다고 하겠다. 온 겨레가 민족주의로 뭉쳐서 국난을 극복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둘째로 조선황실 발상신화로서의 일월오악도를 생생히 되살려 놓으려는 매서운 집념을 가졌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조선황실이 무너지는 것을 절대로 좌시할 수가 없었고, 조선황실이 확고하게 되살아 날 것을 절실히 기도했을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나라는 힘찬 국력을 갖고 동아시아의 강대국이 될 것이며, 우리의 임금님은 단호하게 다시 모셔져 위대한 나랏님이 될 것을 확고히 믿었을 것이다.

 

V. 맺는 글

 1 일월오악도가 언제부터 확실하게 임금님의 용상 뒤를 장신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의미를 확실하게 규정지을 근거가 희박하다. 다만 여러 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일월오악도의 등장 배경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일월오악도가 등장 근거를 확실하게 헤아려 볼 중요한 존재로서 전주 경기전(慶基殿)의 것을 들 수 있다. 경기전은 대한황실 발상의 땅을 기념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상징이었기에 그것을 분명히 말할 좋은 준거기준이 된다. 경기전은 원래는 땅이 중요한 것이기에 그 땅을 경기전(慶基殿)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에 숙종 임금님 때에 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모시고서 그 전각 명칭을 경기전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런데 숙종 때는 병자호란 뒤의 들끓는 민족주의의 시대였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효종과 숙종은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설욕할 복수전쟁 준비에 국력을 최대한 기울이고 철저히 군비확장을 했던 임금님들이었다. 그 때에  경기전을 건립한 것이니, 일월오악도는 분명히 민족주의적 존황의식의 고양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겠다. 그러다가 다시 광무(고종)황제 때에 낡은 어진을 다시 그려서 모셨던 것이 현재 전주에 남아 있는데, 광무제 때에도 국난에 처한 민족혼 고양의 시기였음은 물론이다.

 

 둘째로 16세기 중엽의 행사를 그린 홍익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명묘조서총대시예도’에는 일월오악도가 없다가, 19세기에 이것을 다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장서각 소장의 ‘공헌대왕친임서 총대시문무신도’에는 일월오악도가 그려져 있음은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이것도 우리가 예리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데 임진왜란이 16세기말에 일어나고, 병자호란이 17세기 중엽에 발발했음을 유의해야한다. 따라서 일월오악도는 왜란과 호란 이후에 민족주의의 고양과 함께 등장했을 가능성을 아주 강하게 보여 준다.

 

 셋째로 현재까지 알려진 대부분의 일월오악도는 창덕궁에 소재하고 있다.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에 각각 1개씩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일월오악도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이후에 등장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창덕궁은 태종 때에 지었다가 인조반정 때에 인정전만 남고 모두 불에 타버려 완전히 다시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이 불타서 그 후 창덕궁이 주로 정궁으로 쓰였다는 점은 일월오악도가 민족혼이나 임금님의 존중과 깊은 관련이 있으니라고 보며, 경복궁은 광무제 때에 재건축 되었고 덕수궁은 광무제가 말년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경복궁이나 덕수궁의 일월오악도가 광무제 시기의 국난기와 관련이 있다고도 생각된다.

 

 1 원래 우리민족은 예부터 확실한 정치적 중심사상을 갖고 있었다. 고려(高麗)나 고구려(高句麗)는 가우리, 가우자리의 음차이두글로써 가운데 자리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먼 옛날부터 가우리, 가우자리를 국호로 써서, 우리민족이 우주의 중앙을 차지한 뛰어난 민족임을 과시한 사실상의 중화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민족이 뛰어난 선민(選民)이라는 의식이 고려시대까지는 확실하게 이어졌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서서히 무디어지다가 다시 강해지는 흐름을 가졌었다. 그것은 조선의 건국초에는 겉보기 외형상으로는 약해지는 모습이었으나, 태조와 세종, 세조 임금님을 이은 강력한 북방정책이 펼쳐진 것을 볼 때에 실재로는 확고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을 맞아서 확실하게 명나라를 높이는 짧은 기간이 있었지만 다시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에 대해서는 단호한 가우리 중화정신을 회복했었다.

 

 생각하면 왜적의 침입 때에 은혜를 입은 명나라를 고마워하는 외교를 폈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단호한 민족주의적 가우리사상이 강하게 흘렀음을 말하는 것이며, 일월오악도는 호국정신의 상징이요 민족혼의 화신으로서 임금님을 받들어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자는 의지의 극가상징이었다고 생각된다. 태조 이성계 장군의 건국문화가 깃든 마이산이 부각되고, 국난을 맞아 호국정신이 강조되는 국가 분위기 속에서 일월왁도의 위상이 화고 해졌다고 행각된다.

 

 생각하면 그간 우리는 단지 일월오악도를 임금님을 보위하는 그림으로 막연하게만 보아 왔으나, 일월오악도는 민족혼이 승화된 호국정신의 결정체로서 강력하게 발전하는 국권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나랏님으로서의 임금님의 유구한 영광을 기원하는 뜨거운 종황정신의 그림이었다.

 

 2 마이산은 조선시대 최고의 정치적 성지였다. 마이산에는 도장대굴이 있는데, 이는 황제굴 또는 태자굴이라고도 하며 태조 고황제가 100일 기도를 드린 곳으로써 조선 최고의 정치적 성지가 되고 있다. 그렇기에 3대 태종 임금님이 약 20일을 소비하면서까지 이곳에 들러 국가적 제사를 모셨을 정도로 중요하게 다룬 곳이다.

 

 태조 고황제의 꿈에 나타난 산신령이 임금님이 될 것을 승인하고 금척을 내린 성스러운 곳인 만큼, 조선말기의 국난을 맞아서 일어난 호남 최초의 자발적 의병 창의지가 바로 이곳이었음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석용, 전기홍이 중심이 되어 태조 고황제가 말을 매었던 주필지에 500여명을 쌓고서 의병창의(義兵倡儀)의 깃발을 든 것이다. 그 날은 단기 4240년(1907년) 9월 12일이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진안읍에서 최초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특히 의병이 일어나게 되는 기초적 마음가짐이 중요한다. 그것은 마이산이 바로 조선창업의 천명지(天命地)였기에 그런 것이며, 이곳은 바로 태조 고황제가 왜구를 물리치고 들른 곳인 만큼 다시 쳐들어오는 왜적을 물리칠 것을 맹약할 장소로는 가장 첫 손에 꼽힐 곳이기 때문이다.

 

 마이산은 조선시대에 있어서는 정치의식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의 성지가 분명했고,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국가에 어려움이 닥치면 마이산을 찾고 마이산을 생각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갑룡이 국난을 맞아서 전국을 떠돌다가 마이산에 정착한 것도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마이산은 살아있는 일월오악도로서, 조선시대의 정치적 최고성지로서 모든 정치의식을 이끈 토대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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